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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발 일지를 통해 매일매일 뭘 작업했는지 쓰고 있지만, 이건 그날 한 일을 간단히 요약한 것에 가까워 개발 과정에서 어떤 의사결정을 했고 왜 이런 형태로 게임이 만들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다루지 못 하고 있다. 이런 점이 아쉬워서 별도의 개발기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 처음 이 게임을 구상하게 된 계기는 뭐고 어떻게 개발을 시작하게 됐는지부터 시작해보자.

시작

 기나 긴 병특 생활이 끝나고 회사를 그만둔 후 본격적으로 게임 기획에 돌입했다. 먼저 회사를 다니면서 시도했던 여러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우리가 잘 만들 수 있는 게임이 무엇일지 한참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시뮬레이션" 기반의 게임을 만들자는 방향으로 협의가 됐다. 둘 다 시뮬레이션 류 게임을 좋아하기도 하고, 지금 개발 실력 상으로는 액션성이 강한 게임은 만족스러운 퀄리티로 만들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조금 정적이고, 필요한 리소스 양이 적으면서, 우리가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게임에 제일 잘 맞는게 시뮬레이션 장르라는 결론이었다.

 

 여기서 시뮬레이션 관련 이야기를 이것저것 하다가 내가 예전에 만들고 싶었던 게임 소재를 끌고 왔다. 카이로 소프트 스타일의 게임에, "무술 도장"을 운영하는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걸 만들어보면 어떨까 한 것.

이런 카이로소프트 스타일의 관리, 경영에

 

펀치 클럽 같은 느낌의 전투? + 다양한 무술

 그런데 계속 회의를 하다보니 무술을 다양하고 특색있게 만들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동 전투 시뮬레이션 기반의 게임이라면 어쨌든 전투가 보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다양한 무술을 그게 서로 구분이 가게 만들면서 전투가 재밌게 하려면 너무 난이도가 높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다양한 방식의 전투가 손쉽게 구분이 가면서 보는 맛이 있는 게 뭘까 고민을 하다 "무술 도장"이 아니라, 판타지 세계관에서의 "가문"을 운영하는 방식은 어떨까 하는 방향으로 소재를 바꾸었다. 판타지가 배경이면 일단 다양한 마법과 무기를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전투를 다채롭게 만들기가 훨씬 쉬워진다.

 

 근데 이렇게 바꾸려고 하면 "왜 다른 가문이랑 싸우는가?"에 대한 당위성을 주기가 쉽지 않다. 그 외에도, 싸움에서 캐릭터가 죽는 것에 대한 처리도 애매해진다. 죽는다고 다시는 그 캐릭터를 못 쓰게 되면 너무 가혹하고. 뭐 판타지니까 성직자가 전투가 끝날 때마다 다시 살려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다지 설득력 있거나 몰입이 잘 되는 배경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다시 옛날에 만들다 포기했던 게임 컨셉을 가져오자는 이야기를 했다. 몇년 전쯤에 롤 eSports 팀을 운영하는 게임(FM 스타일로)을 만들려고 시도하다가 포기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 판타지 기반의 전투에 eSports라는 배경을 붙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둘 모두 eSports 경기를 거의 하나도 빠지지 않고 챙겨보는 골수 팬이기도 하고, 이런 전투 시뮬레이션에 잘 어울리는 배경 소재라는 생각도 들었다. eSports 배경에, "게임 속 가상의 게임(eSports의 대상이 되는)"이 판타지 배경의 전투면 어색한 부분이 없으니까.

 

 그래서 이 발상을 기본으로 간단하게 프로토 타이핑을 해 보았다.

전투 프로토타이핑

길 찾기 구현 등이 잘 되는지 확인도 해 볼겸 해서, 검사 / 궁수 두 종류의 유닛만 있는 전투 시뮬레이션을 간단하게 만들어보았다. 만들고 보니 리소스 작업도 어렵지 않을 것 같고, 엄청 단순한 전투임에도 나름대로 보는 맛이 있고 괜찮았다.

전략, 전술...

이제 이 전투에서 플레이어가 끼칠 수 있는 영향이 무엇인지를 고민할 차례였다. FM에서 전략 전술 설정하듯이 선수별 플레이 성향을 정한다거나, 포메이션을 정한다거나 넣을 수 있는 요소는 굉장히 많았다. 그런데, 우리가 만들려는 게임은 FM과는 아주 큰 차별점이 있었다. 바로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게임"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이었다.

 

 우리가 게임 속에 만들어놓은 가상의 전투 시뮬레이션은 실존하는 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설정이 복잡해질수록 플레이어가 느낄 진입 장벽은 기하 급수적으로 높아진다. 그래서 플레이 과정에서 최대한 게임을 직관적으로 빠르게 이해하고 몰입하게 만들려면 복잡한 전략, 전술 설정을 넣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만 플레이어가 인게임 시뮬레이션에 개입할 수 있는 요소가 너무 적으면 그건 그것대로 재미가 없다. 그래서 아주 간단한 규칙이면서, 나름대로의 깊이가 있고, 플레이어가 본인의 전략 전술을 시도할 수 있는게 무엇일지 고민을 하다가 내린 결론은 "밴픽에 몰빵하자" 였다.

롤 경기를 보다 보면 항상 "밴픽" 이야기는 빠질 수 없다

 밴픽은 롤 경기를 좀 본 사람들이라면 익숙하고, 또 eSports 경기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로 거론되는 것이기도 하다. 밴픽은 여러 챔피언에 대해 전략적으로 특정 챔피언을 밴하고, 내가 유리한 챔피언을 가져오고, 원하는 조합을 정하고, 상대 조합을 카운터치고, 등등 아주 간단한 규칙 하에서 굉장히 다양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매커니즘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점에서 했던 가장 큰 걱정은 밴픽 외의 모든 인게임 개입 요소를 제외하면 게임의 깊이가 너무 부족하지 않을까, 플레이어가 빨리 질리지는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몇 가지 특성을 가진 챔피언들을 빨리 구현해서 밴픽 기반의 전투를 최대한 빠르게 테스트해봐야한다고 생각했다.

게임 룰

 진입 장벽 측면에서 고민했던 또 다른 요소는 인게임 전투의 승패를 결정하는 규칙이었다. 이것도 역시 비직관적이고 복잡하면 플레이어가 그만큼 배워야 할 게 많기 때문에 최대한 단순하고 직관적인 규칙으로 설정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연히 여기에 제일 잘 어울리는 규칙은 "데스 매치"다. 그냥 정해진 시간동안 싸우고, 킬이 더 많이 나오는 쪽이 이기니까 아주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쉽다.

 

 여기서 했던 가장 큰 걱정은 "한쪽이 한 번 유리해지면 게임이 무조건 원사이드하게 끝나서 보는 재미가 너무 없지 않을까"였다. 데스매치라는 특성 상, 그리고 순수하게 AI로 게임이 결정되는 특성상 충분히 이럴 확률이 높다고 봤다. 이 부분 역시 프로토타이핑을 통해 빠르게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었다.

챔피언 설계

 다음은 챔피언 설계와 관련한 부분이었다. 픽밴을 하려면 우선 게임에서 쓰일 챔피언 설계가 필요했고,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진입 장벽의 문제가 있었다. 여기서 롤처럼 챔피언의 개성을 살리려고 한다면 또 플레이어는 챔피언 하나 하나가 무슨 역할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어진다. 어쨌거나 게임을 시작하고 맨 첫번째 경기는 각 챔피언이 어떤지 정보가 전혀 없는 채로 플레이를 해야하는데, 여기서 보이는 챔피언이 완전 생소하고 알아보기 힘든 챔피언이면 밴픽 과정이 너무 비직관적이고 뭘 해야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각 챔피언은 스테레오타입을 따르게 설계하려고 했다. 맨 처음 프로토타이핑을 할 때 생각했던 챔피언은 "검사", "궁수", "닌자", "기사", "격투가", "화염술사", "성직자", "무녀", "몽크"의 9종류였다. 이렇게 명시적으로 판타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의 디자인을 쓰면 플레이어 입장에서 각각의 챔피언이 어떤 역할인지 좀 쉽게 파악할 수가 있다. 대충 검사는 근접 딜러, 궁수는 원거리 딜러, 기사는 근접 탱커, 격투가는 근접 딜탱, 화염술사는 마법사, 성직자, 무녀는 힐러, 몽크는 힐 + 탱 이겠구나 하는 인식이 있으니까. 그래서 챔피언 이름도 별도로 붙이지 않고 그냥 직업 명을 그대로 붙이는 방향으로 정했다.

 

 이렇게 정한 초반 챔피언과 각 챔피언 역할 분류에 따른 스킬, 스탯 설계를 한 후, 본격적으로 개발을 시작했다. 이 게임의 핵심적인 재미는 전투 시뮬레이션 및 밴픽을 통한 전술 설립에 있고 나머지는 그냥 전투 시뮬레이션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주변 요소에 해당한다고 봤다. 그래서 전투 시뮬레이션을 빠르게 구현하고, 밴픽을 통해 전술을 정하는게 재밌는가를 검증하는 것을 맨 첫번째 마일스톤으로 잡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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